한 해를 보내며
겨울 햇살을 토막 낸 오후는 무덤덤하게 껌뻑 거리고
어둡기 전까지 흔들리던 시간이 빨간 신호등 아래 정지해 버립니다.
다른 길에 양보하란 신호지만
잠시 멈추란 거지요.
멈추어서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리고 나를 보라는 거지요.
검은 눈 수북한 도로 옆으로 무심한 눈길 돌릴 때
누추한 낡은 십자가 하나 들어옵니다.
어릴 때 시골 교회 빛 바랜 벽에서 본듯한,
자세히 바라보면 끝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
늙은 십자가 그림자,
제 그림자에 겹쳐집니다.
그 때도 조그만 나를 불렀던 그 십자가.
먼저 나를 찾았고
나를 사랑했고
나를 안아줬지만
장식처럼 달고 다니다
빨간 신호등 불빛 아래서 겨우 알아 본 나는
급하게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총총히 가던 길을 갑니다.
죽는 날까지 부끄러운 얼굴
외투 깃에 파묻고 가는 길은
바람 같은 12월의 끝자락에서 초라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.
버려져야 마땅 할 몸, 십자가로 사신 당신을 버리고 온 저녁은 눈물 나게 화목합니다.
십자가가 찾아 준 몸이 돌아 갈 곳은
내 십자가 묻혀 있는 검은 눈 더미
덮고 있던 검은 눈 쓸어 버리고
뚫어진 작은 구멍에 손가락 넣어 바람 막아 주는 그 때
비로서 돌아오는 첫 사랑 그 모습
무릎 꿇은 후
'다시 사랑할께요'
부끄러운 입술 위로
새해의 밝은 빛 따뜻하게 서려오고
십자가를 꼭 안은 그 길 위엔
파란 신호등 빛 넓게 퍼져 가고 있습니다.